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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뿌리를 말하다: 중구·서구·동구 지명 유래와 역사 이야기

by hwanee7 2025. 6. 8.

 

부산광역시의 중구, 서구, 동구는 부산의 도시 형성과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원도심 지역이다. 이 지역의 행정동 이름은 단순한 지리적 구분을 넘어서, 자연 지형, 역사적 사건, 주민 생활과 문화 등을 담고 있는 고유한 언어적 자산이다. 각 동의 명칭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생활사와 공간 기억의 결정체로, 그 유래를 살펴보면 부산의 도시 정체성과 문화적 흐름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 관할 행정동(구/동) 및 어원

 

먼저 중구는 부산이라는 도시명이 가장 먼저 불린 곳으로, 항만과 행정의 중심지였다.


중구에는 광복동, 남포동, 보수동, 동광동, 대청동, 중앙동, 부평동, 영주동 등이 있다.


광복동’은 일제강점기 이후 해방의 기쁨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1945년 광복을 맞은 후 일본 상권이 있던 지역을 되찾으며 명명되었다.


남포동’은 ‘남쪽의 포구’라는 의미로, 부산포 남쪽 해안에 위치한 항구 마을에서 유래했다.


보수동’은 조선시대 장인과 목수 등 기술자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에서 유래했으며, ‘수리한다’는 뜻의 ‘보수’가 그대로 지명이 되었다.


동광동’은 동쪽에 위치한 지역에 새 빛이 든다는 의미에서 ‘빛 동(東光)’을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방 이후 새출발의 상징으로 명명된 지명으로 해석된다.


대청동’은 ‘큰 푸른 마을’이라는 뜻으로, 자연환경이 수려하고 넓은 지대를 의미한다.


중앙동’은 행정·금융·상업의 중심에 있었던 지역으로, 이름 그대로 도시의 ‘중심’임을 나타낸다.


부평동’은 본래 ‘부자들의 평야’ 또는 ‘넓은 평지’를 뜻하는 이름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큰 장이 열리는 ‘부평정(富平亭)’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영주동’은 ‘영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항구도시 부산의 번영을 염원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으로 서구는 부산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며, 해안지형과 언덕 마을이 특징인 지역이다.


행정동으로는 동대신동1~3가, 서대신동1~3가, 아미동, 남부민동, 토성동, 암남동이 있다.


동대신동’과 ‘서대신동’은 조선시대 방(坊) 단위의 행정구역인 ‘대신방(大新坊)’에서 유래하였다. 이 지역은 새로 개간된 마을로, '대신'은 ‘크고 새로운 동네’를 의미하며, 그 위치에 따라 동서로 나뉘었다.


아미동(峨嵋洞)’은 중국 사천성의 아름다운 산 ‘아미산(峨眉山)’에서 따왔다는 설과, 산 능선이 미인의 눈썹처럼 부드럽다는 형상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남부민동’은 ‘남쪽에 있는 백성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일반 평민들이 해안가에 모여 살던 자연촌에서 유래되었다.


토성동’은 ‘흙으로 만든 성곽’이라는 뜻으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때 군사 방어를 위해 토성(土城)을 쌓았던 지역에서 유래했다.


암남동(岩南洞)’은 ‘바위(岩)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암석지형이 해안 절벽을 따라 펼쳐진 지역을 의미한다. 특히 송도 해안과 이어지는 바위지대의 특징이 지명에 반영되었다.

 

마지막으로 동구는 부산역이 있는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이며, 개항과 함께 도시화가 가장 먼저 진행된 구역이다.


소속된 행정동은 초량동, 수정동, 좌천동, 범일동이다.


초량동(草梁洞)’은 풀밭의 언덕이라는 의미로, 원래 목초지가 넓게 펼쳐졌던 평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일본인 거류지인 왜관(倭館)이 설치되었고, 개항기 무역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수정동(水井洞)’은 ‘샘과 우물이 많던 동네’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수원이 풍부하여 주민 생활에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


좌천동(佐川洞)’은 ‘냇가를 돕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조선시대 하급 관리나 행정 보조 기능이 집중되었던 구역이라는 의미도 있다.


범일동(凡一洞)’은 여러 작은 마을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로 모인 동네’라는 의미로 붙여졌다. 범(凡)은 ‘모두’라는 뜻을, 일(一)은 ‘하나’를 의미한다.

 

이처럼 부산 중구, 서구, 동구에 속한 각각의 동 이름은 모두 고유의 자연환경, 역사적 배경, 사회 구조에 따라 생겨났으며, 어떤 지명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어떤 지명은 시대적 상징과 생활 형태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어원들은 단순한 명칭을 넘어 도시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자취로, 오늘날에도 도시 재생, 문화콘텐츠, 지역 정체성의 기반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지역들은 부산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품은 살아 있는 지명사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 지명 유래 및 역사이야기

 

부산광역시의 중구, 서구, 동구는 단순한 행정 구역 이상의 의미를 지닌 도시의 원형이자, 부산이라는 도시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가장 중심적인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개항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재건의 시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변화를 몸소 겪어낸 공간이다. 이곳의 지명 유래와 역사 이야기를 살펴보면 부산의 정체성과 도시의 뿌리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중구는 부산이라는 이름의 기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지역이다. ‘부산’이라는 지명은 조선 초기 문헌인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에 처음 등장하며, ‘가마솥처럼 생긴 산’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이 가마솥 산으로 불리는 산은 중구 좌천동 일대의 증산(甑山) 혹은 현재 용두산공원이 있는 자성대산이라는 두 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좌천동의 증산이 지형과 문헌 기록상 부산 지명의 유래로 더 유력하다고 본다. ‘부산’이라는 이름은 처음에는 포구인 부산포(釜山浦)에만 한정되어 사용되었으나, 개항 이후 점차 도시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중구는 조선 후기부터 부산포 왜관이 설치되어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근대 도시화가 시작된다. 이 시기 초량왜관이 철거되고 일본인들이 정착하면서 일본 조계가 형성되었고, 그로 인해 광복동·남포동·보수동 등 원도심 일대에 일본풍 건축물과 상업구역이 확산되었다. 해방 이후 이 지역은 ‘광복’의 의미를 기려 광복동이라는 지명이 탄생하고,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 등 피란민 중심 상권이 형성되며 다시 한국인의 도시로 탈바꿈한다. 40계단용두산공원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상징적인 장소로, 이별과 재회의 공간으로도 기억된다.

 

서구는 부산의 서쪽 해안에 자리 잡은 구역으로, 오래전부터 자연지형과 민간 거주지가 함께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토성동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이 일대에는 삼국시대 또는 고려시대 때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산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의 시설로 추정되며, 지역 명칭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구의 대표적 역사 상징은 1913년에 조성된 송도해수욕장이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도 많은 이들의 피서지이자 생활문화의 중심이었다.

 

또한 아미동은 원래 공동묘지였던 장소로,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지역이다. 이 과정에서 무덤 비석을 집의 주춧돌이나 벽체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형성된 비석문화마을은 오늘날까지 전쟁과 생존의 역사를 담은 장소로 남아 있다. 아미동은 피란과 정착이라는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문화재적 가치도 지닌다.

 

동구는 개항 이후 철도·무역·물류의 중심지로 급속하게 발전한 지역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초량왜관이 설치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초량동은 조선과 일본 간 외교·통상이 이루어진 거점으로, 1876년 이후 일본 조계지로 확대되며 부산 도시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후 부산진역부산역이 들어서며 동구는 철도 기반 산업과 교역 중심지로 발전했고, 이를 통해 부산은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화를 이룬 도시가 되었다.

 

동구의 초량 이바구길은 한국전쟁 후 피란민들이 산복도로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골목들로,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마다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가 녹아 있다. 이 일대는 현재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부산의 근현대사를 조명하는 관광 자원으로 탈바꿈되었으며, 주민의 삶과 도시의 기억이 함께 보존되고 있다.

 

수정동과 좌천동, 범일동 등은 철도노선과 인접해 있어 부산항과의 물류 연계가 활발했던 지역으로, 산업화 시기에 공장과 창고, 이주 노동자들의 거주지가 집중된 구역이었다. ‘수정’은 샘이 많아 마을 이름이 되었고, ‘좌천’은 조선시대 보조 행정 기능이 있던 지역 또는 지리적으로 하류 지역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범일동’은 여러 마을을 통합하며 새로 지은 이름으로, 해방 이후 행정구역 재편에 따라 만들어진 지명이다.

 

 

 

📚 주요 문화유산 및 명소

 

🔸 중구 – “부산의 근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원도심”

  1. 용두산공원 & 부산타워
    • 부산 중구의 대표적인 상징공간.
    •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용이 승천하는 형상의 산’이라 하여 용두산으로 불림.
    • 해방 이후 광복기념탑, 부산타워 등이 들어서며 시민의 휴식공간이자 관광 명소로 성장.
  2. 광복로 & 국제시장
    • ‘광복’ 이후 명명된 거리로,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과 상인들이 몰려들며 형성.
    • 인근의 국제시장, 자갈치시장과 연계되어 부산 경제 부흥의 상징.
  3. 40계단 문화관광지
    • 한국전쟁 당시 이곳을 통해 올라온 피란민들이 많아, 재회의 장소, 이별의 계단으로 불림.
    • 지금은 문화계단으로 조성되어 음악과 스토리텔링 요소를 더해 관광자원화.

 

 

🔸 서구 – “항구의 풍경과 삶의 기억이 남아 있는 마을들”

  1. 송도해수욕장
    • 대한민국 최초의 공설 해수욕장(1913년 개장).
    • ‘송림이 많던 섬’이라 하여 **송도(松島)**로 명명됨.
    • 해수욕장, 해상 케이블카, 스카이워크 등과 어우러져 전통과 현대가 공존.
  2.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 6.25 전쟁 후 피란민들이 공동묘지 위에 정착한 곳.
    • 묘비를 주춧돌 삼아 만든 집들이 ‘비석 집’이라는 독특한 경관을 형성.
    • 오늘날에는 전쟁과 생존의 역사, 삶의 재건을 기억하는 장소.
  3. 암남공원 & 천마산로
    • 낙동강 하구와 이어지는 해안절벽 경관.
    • 천마산로는 아름다운 야경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

 

 

🔸 동구 – “이주민의 역사와 철도, 개항의 중심지”

  1. 초량 이바구길
    • ‘이바구’는 부산 사투리로 ‘이야기’를 뜻함.
    •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가파른 언덕에 형성한 주거지에서 출발.
    • 현재는 골목마다 근현대사 이야기가 벽화, 사진, 전시물로 꾸며져 있음.
  2. 부산역 & 부산진역 역사관
    • 일제강점기 개항과 철도 확장에 따라 조성된 동구의 철도 유산.
    • **부산진역(옛 역)**은 현재 철도 역사관으로 보존.
  3. 168계단 & 모노레일
    • 동구의 경사진 지형을 대표하는 상징적 장소.
    • 도시재생 사업으로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관광객의 접근성을 높임.

 

 

 

 

📚 설화·전설 모음

 

🔹 용두산의 용 전설 (중구)

  • 옛날 용두산에는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용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 이 용이 인간을 도우며 선행을 베풀자, 하늘이 감동하여 그 산을 용두산이라 칭하고, 그 머리 부분에 영기를 간직한 안개가 자주 드리운다는 전설이 있음.
  • 지금의 부산타워가 있는 곳이 용의 머리 위치라는 속설도 전해진다.

 

🔹 아미동 ‘비석의 저주’ 이야기 (서구)

  • 아미동은 일제강점기 공동묘지였고, 전쟁 후 피란민들이 무덤 위에 정착했다.
  • 오래전 어느 무덤을 허물고 지은 집에서 연이은 불행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비석의 저주’로 여겨 두려워했다고 한다.
  • 이후로 일부 가정은 비석을 지붕 밑에 그대로 두거나, 제사를 지내며 공경하는 문화가 생겼다고 함.

 

🔹 좌천동 ‘증산’과 용샘 이야기 (동구)

  • 좌천동 증산(甑山)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용이 살던 샘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이 샘에서 물을 떠다 마시면 병이 낫고 소원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많은 이들이 순례하듯 찾았다고 함.
  • 지금은 사라졌지만, ‘용샘’이라는 지명이 잠시 존재했던 기록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