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북동부에 위치한 포천시는 자연환경과 역사문화가 어우러진 고장으로, 과거에는 포천군으로 불리다가 2003년 시로 승격되었습니다. 포천이라는 이름은 ‘포(抱)’는 ‘안다, 품다’는 의미, ‘천(川)’은 ‘강, 내’를 의미하여, 전체적으로 ‘물이 감싸는 고을’, 즉 **‘강을 품은 도시’**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한탄강과 영평천, 포천천 등 주요 하천이 도시를 감싸고 있는 지형적 특성과도 맞물립니다.
현재 포천시는 1개 읍(소흘읍), 11개 면, 2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지역의 이름에는 고대부터 내려온 역사와 전통, 지형적 특색이 담겨 있습니다.
🗺️ 포천의 읍·면·동, 이름에 담긴 땅의 기억
포천시의 중심 행정동으로, 과거에는 ‘포천면’이었으며, 조선 시대에 포천현(抱川縣)의 중심지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포천’의 뜻 그대로, 하천이 감싸는 지형에 자리한 고을로부터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행정 중심지로서 오래전부터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해왔습니다.
‘선단(仙壇)’이라는 이름은 ‘신선이 내려와 제를 지내던 단(壇)’이란 뜻으로, 마을 뒷산인 왕방산(旺方山)의 바위 위에서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던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즉, 신선의 제단이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지명이 생겨난 것으로, 전통 신앙과 자연지형이 결합된 사례입니다.
‘소흘(召忽)’은 고구려 시대에 사용되던 이름으로, 역사적 기록에 등장하는 고유명사입니다. ‘召’는 부르다, ‘忽’은 옛 지명에서 성읍이나 마을을 나타내는 접미어로 자주 쓰입니다. 소흘읍은 과거 한탄강 유역의 중심지였으며, 고구려의 마홀군 또는 소홀군으로 추정되는 지역입니다. 현재는 포천시 남부 관문으로, 서울과 인접해 인구와 산업이 급격히 증가한 지역입니다.
‘군내(郡內)’는 문자 그대로 ‘군의 안쪽’, 즉 예전 포천군청이 있던 중심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포천동에 행정 기능이 집중되었지만, 과거에는 군내면이 포천지역 행정의 심장부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습니다. 현재도 포천시 북부의 핵심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신북(新北)’은 ‘새로운 북쪽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군내면에서 분리된 신설 행정구역으로, 포천 북부 지역을 대표하는 농촌지역입니다. ‘신’은 신설(新設) 행정구역의 의미, ‘북’은 위치를 의미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룬 전원지대가 펼쳐집니다.
‘영(永)’은 영평천에서 따온 명칭이며, ‘북’은 북쪽, ‘중’은 중앙을 의미합니다. 즉, 영북면은 ‘영평천 북쪽’, 영중면은 ‘영평천 중간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징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이 두 면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이미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고을이었습니다.
‘창수(昌壽)’는 ‘창성하고 오래 살아라’는 길상어(吉祥語)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지명은 예부터 풍수적으로 길지로 여겨졌던 마을이라는 점을 반영하며, 주민들의 장수와 마을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부터 ‘창수리’라는 명칭이 문헌에 등장합니다.
‘일동(日東)’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부터 동녘 산줄기와 계곡을 따라 해가 잘 드는 지역으로 인식되었으며, 농경과 마을 생활이 잘 발달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동(二東)’은 두 번째 동쪽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일동면보다 조금 더 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고대부터 이주민 유입이 잦았던 평야 지대입니다. 지형상 일동과 연계되어 자연스럽게 붙여진 명칭입니다.
‘가산(加山)’은 ‘산이 더해진 지역’, 혹은 ‘높은 산이 겹겹이 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운악산과 한북정맥 줄기를 따라 험준한 산세가 이어지는 지역이며, 산촌과 전통 농업이 혼재하는 전원지대입니다.
‘내촌(內村)’은 ‘강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즉, 내(川) 안쪽에 있는 촌락이라는 의미로, 영평천 유역 내에 분포한 농촌 마을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강과 들이 조화된 지형 구조로, 고대부터 취락이 형성된 오래된 지역입니다.
‘화현(華峴)’은 ‘아름다운 고개’라는 뜻입니다. ‘화(華)’는 아름다움을, ‘현(峴)’은 고개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이 지역은 산줄기와 고개가 많은 지형 특성을 갖고 있으며, 자연 친화적 마을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교통과 물류의 관문이자 고갯마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 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관인(官仁)’은 조선 시대 관아와 관련된 ‘관(官)’, 또는 ‘인(仁)’은 선정을 베풀었던 지역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다른 해석으로는 ‘관문에 위치한 인심 좋은 마을’이라는 풀이도 있으며, 북부 접경지대로서 국경 방어의 전초 마을 역할을 했습니다.
📖 고구려에서 조선, 현대까지 – 시대별로 읽는 포천의 역사
고대에는 포천 일대를 고구려에서 ‘마홀군(馬忽郡)’ 또는 ‘소홀(召忽)’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지금의 소흘읍 지명에 일부 반영되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이곳을 ‘견성군(堅城郡)’,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청성군(靑城郡)’으로 바꾸었고, 고려 태조 23년(940년)에는 ‘포주(抱州)’라 하여 지금의 지명과 유사한 형태가 등장합니다.
포천은 고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통 중심지로 기능해왔습니다. 특히 한탄강 협곡 지대와 북부 산악지형은 방어와 감시를 위한 전략적 가치를 지녔고, 삼국시대에는 국경 수비를 위한 성곽과 보루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이 일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퉜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양주와 함께 경기도 북부 방어선의 일부로 기능하였으며, 명종 대에는 포천을 거쳐 북방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따라 관방시설과 진보(鎭堡)가 구축되었습니다. 특히 운악산과 왕방산, 명성산 등 험한 산맥이 포천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는 방어뿐 아니라 왕실의 피난처로도 고려되었습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 행정제도 정비 과정에서 현재의 ‘포천(抱川)’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확립되었으며, 이후 여러 군현 통폐합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근대에는 일제강점기 동안 포천은 군수물자 수송로 및 광물 채굴지로 기능했습니다. 광업과 임산업이 일시적으로 발달했고, 이후 6·25전쟁 시기에는 중부전선 주요 방어선과 피난 경로로 활용되면서 많은 전쟁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현대에는 군사도시의 특성과 수도권 외곽 배후 도시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며 발전하고 있으며, 접경지역으로서의 전략성과 자연생태 관광자원을 겸비한 도시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 한탄강부터 산정호수까지 – 포천에서 만나는 유산과 명소
경기도 포천시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선사시대부터 조선,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문화적 유산이 살아 숨 쉬는 지역입니다. 한탄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형은 국가지질공원과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며, 주민과 방문객 모두에게 역사와 자연의 풍요로움을 선사합니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포천을 대표하는 자연 문화유산은 단연 한탄강 국가지질공원입니다. 이곳은 50만 년 전 북한의 오리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주상절리와 협곡이 압권이며, 202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한탄강의 협곡과 다양한 암석들은 단순한 관광 자원을 넘어 지구 지질 역사와 한반도 자연사의 귀중한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산정호수
‘산이 만든 맑은 거울’이라 불리는 산정호수(山井湖水)는 왕방산과 명성산 사이에 위치한 인공호수로, 일제강점기 수리용 저수지로 시작해 지금은 사계절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이 아름다워 연인과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이 찾으며, 영화·드라마 촬영지로도 자주 등장하는 곳입니다.
왕방산성과 독립운동 유적
포천의 왕방산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모두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산 중턱에는 고대 산성 유적이 남아 있으며, 일제 시기에는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이 은신하던 장소로 기록됩니다. 특히 왕방산 자락의 ‘호국로’ 일대는 항일 독립운동 관련 문화기념지로서 의미가 깊은 장소입니다.
자작동 지석묘와 유인선 효우비
포천시 자작동에는 선사시대 지석묘(고인돌)가 존재하며, 이는 초기 철기시대 포천 지역의 생활상과 장례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인근에는 조선 후기 인물 유인선의 효성과 우애를 기리기 위한 효우비(孝友碑)가 세워져 있어, 포천의 전통 유교 정신과 향촌 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포천 아트밸리
버려졌던 화강암 채석장을 재생한 문화공간인 포천 아트밸리는 예술과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재생 성공 사례입니다. 인공 호수, 조각공원, 전시관, 천문과학관 등이 갖춰져 있으며, 각종 예술 공연과 체험 행사가 열려 문화·예술 관광 도시로서의 포천의 위상을 상징합니다.
🌌 궁예, 구렁이, 여우고개 – 포천에 내려오는 이야기들
포천 지역은 수려한 자연 속에 오래된 마을과 전통이 살아 있어 다양한 설화와 전설이 전해집니다. 특히 자연지형과 인간의 삶이 연결된 이야기, 동물·귀물 관련 민속신앙, 왕과 장수의 전설 등이 대표적입니다.
궁예의 명성산 전설
포천 명성산에는 후고구려 왕 궁예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는 궁에서 쫓겨나 명성산 자락에 은신했지만, 끝내 병사들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 시신이 무겁게 움직이지 않아 바위 아래 돌을 덮어 무덤을 삼았다는 전설은 지금도 지역주민들 사이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명성산 일대에는 실제로 궁예를 기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구렁이 선비 설화
포천 일동면과 이동면 일대에는 ‘구렁이 선비’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가난한 집안의 셋째 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렁이와 혼인하게 되었으나, 사실 그는 용왕의 아들이자 사람으로 환생한 존재였다는 내용입니다. 언니들의 질투, 금기의 파기, 시련과 극복이라는 한국형 변신 설화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전통적인 효와 정절의 미덕을 강조한 이야기로도 읽힙니다.
여우고개의 전설
소흘읍 고모리에는 ‘여우고개’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밤 산짐승을 피해 도망치던 나그네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고개를 건너게 해주었는데, 알고 보니 여우가 둔갑한 존재였다고 합니다. 이후 이곳은 ‘여우고개’라 불리며, 귀신 설화와 연결된 마을 신앙이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돌부처 전설
포천의 산정호수 근처에는 돌부처와 관련된 전설도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이 시주를 거절당하고 떠나려 하자 자비심 깊은 여인이 뒤를 돌아보다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불심, 자비, 경건함을 강조하는 교훈적 전설로, 불교가 지역 신앙에 깊이 스며 있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