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서남부,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영등포구(永登浦區)는 서울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 변화를 겪은 지역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농업 중심의 평야 지대였던 이곳은, 1899년 경인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수운과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이어 일제강점기에는 서울 최대의 공업단지가 형성되면서 산업화의 상징이 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상업, 교통, 금융, 문화가 어우러지는 서울 서남권 핵심 도시로 자리를 잡아왔다. 지명 하나하나에는 이처럼 전통과 근대, 산업과 문화가 어우러진 다양한 스토리가 녹아 있다.
✅ 영등포구 관할 행정동 및 어원
영등포구는 현재 총 18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동의 명칭은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 민속 신앙, 산업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영등포동은 조선 후기부터 불려온 이름으로, '영등굿'이라는 민속 제례와 한강변 수운지였던 지역 특성이 결합된 지명이다. ‘영등(永登)’은 명백한 한자 지명이지만, 실제 어원은 바람의 신을 모시는 무속 행사인 ‘영등굿’에서 비롯되었고, ‘포(浦)’는 물가나 나루를 의미하여, 자연과 민속이 함께 깃든 명칭이다.
여의동은 오늘날의 여의도를 포함한 지역으로, 과거에는 ‘너의 섬’ 혹은 ‘여읠 섬’이라고 불렸던 데서 유래하였다. 한강의 잦은 범람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대는 물에 잠기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지형적 특성이 '여의(汝矣)'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이어졌고, 오늘날에는 정치·금융 중심지로 상징되는 도시의 얼굴이 되었다.
당산동은 마을의 공동신앙이었던 부군당에서 유래되었으며, 지역 내에 당나무가 많았다는 기록도 함께 전해진다. ‘당산’은 ‘마을의 신목이 있는 언덕’ 또는 ‘당제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을 의미하며, 지금도 지역 축제나 거리명 등에서 전통의 흔적이 이어지고 있다.
도림동은 ‘도(道)’와 ‘림(林)’, 즉 ‘길가의 숲’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도림천을 따라 형성된 자연 지형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국도와 접한 위치적 특징과 자연스러운 숲길이 어우러진 곳으로, 도심 속에서도 비교적 한적하고 자연친화적인 주거지로 인식되어 왔다.
문래동은 일제강점기 방직공장이 대거 들어서면서 산업화가 시작된 지역이다. ‘문래(文來)’는 광복 이후 ‘물레방아’에서 따온 순우리말 어원을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전통 방직과 산업 근대화의 상징성을 지닌다. 지금은 문래창작촌 등 문화예술지구로 재탄생하며, 예술과 산업이 공존하는 독특한 도심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양평동은 양화진과 가까운 위치에 형성된 넓은 벌판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양(楊)’은 양화도의 줄임말로 버드나무를, ‘평(坪)’은 평평한 벌판을 뜻하며, 한강 나루와 연결된 농업 중심의 자연 마을이었다.
양화동은 선유도 인근의 자연지형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양화(楊花)’는 버드나무 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일대에는 조선시대부터 수림이 울창했고, 여름철 한강변 정취를 즐기기 위해 찾는 인파가 많았다고 한다.
신길동은 ‘새로운 길’, 혹은 ‘새로운 행운’을 뜻하는 이름이다. 과거 도시 확장과 함께 외지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라는 점에서, 개척의 의미를 담은 지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림동은 ‘큰 숲’이라는 뜻의 대림(大林)에서 비롯되었으며, 신대방과 신도림 지역 사이에 위치한 점에서 두 지명을 결합해 만든 신흥 동명이다. 안양천과 접해 있는 하천지대로, 지금은 외국인 밀집 지역이자 아시아 문화가 공존하는 이색적인 생활권으로 변화하고 있다.
🏯 영등포구 내 어원 및 사연이 깃든 지역・지명
영등포에는 공식적인 행정동 외에도 옛 지명과 입말로 전해지는 고유 지명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 속에는 당시 주민들의 생활상과 역사적 맥락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죽마루는 현재 신세계백화점 인근의 삼각지 일대를 일컫는 말로, 비가 오면 땅이 진흙처럼 질어 '죽처럼 질다'는 표현에서 유래된 별칭이다. 길이 질척한 탓에 수레나 가마가 잘 다니지 못했으며, 주민들 사이에선 교통의 애환이 담긴 상징적 지명으로 회자된다.
옹기말은 영등포7가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과거 조선시대부터 6.25 전쟁 전까지 실제로 옹기를 굽고 팔던 가마터가 있었던 마을이다. 흙과 불이 어우러졌던 노동의 현장이자, 지역 생계의 근간이 되었던 공간으로 기억된다.
백간집터는 과거 99칸짜리 대저택이 있었던 자리로, 신세계백화점 건너편 삼각지 내부에 위치했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한양 부유층의 저택이 있었던 흔적이었으며, 이후 도시개발로 건물은 사라졌지만 지명은 여전히 주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연못자리는 옛 서울역행 전차 종점이 있던 영등포역 일대의 연못 부지를 일컫는 말이다. 이곳은 일대에서 가장 낮은 지대로, 빗물과 지하수의 유입으로 연못이 형성되었고, 지역 아이들이 놀던 공간이자 한때 풍요로움을 상징하던 장소였다.
오백채는 문래동4가 일대에 1940년대 일본에 의해 조성된 대규모 영단주택단지를 말한다. ‘오백 채나 되는 집이 있다’는 말에서 유래된 이 이름은, 도시계획적 주거지의 시작이자, 일제시대 주거정책의 흔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명이다.
📚 영등포구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
영등포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약 7천 년 전 신석기인의 유물이 발견된 바 있으며,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소국 중 하나로 알려졌다. 삼국시대 이후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경계에서 각축장이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금천현과 양천현에 속해 있던 넓은 농업지대였다.
1899년 경인선 철도 개통과 영등포역의 설치는 이 지역을 한강 이남 서울 외곽에서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대규모 공장과 물류시설이 들어서면서 서울 제1의 공업지대로 성장하였고, 1943년 ‘영등포구’라는 명칭으로 구제(區制)가 실시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계속해서 산업과 상업이 발전하였으며, 1963년에는 구로·금천·양천 지역이 편입되며 영등포구의 행정구역은 더욱 확대되었다. 1970~80년대에는 산업화와 도시개발이 동시에 진행되었고, 철도와 지하철, 대형 유통시설이 들어서며 교통과 유통의 요지로 기능하였다.
최근에는 문래창작촌, 영등포 타임스퀘어, 여의도 금융지구 등을 중심으로 산업, 예술, 금융이 공존하는 복합문화 도시로 변화하고 있다. 과거의 공업 도시에서 벗어나, 도시재생과 지역 자산을 활용한 새로운 ‘도심형 문화지구’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