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송파구(松坡區)는 한강 남쪽에 자리한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바탕으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화를 경험해온 서울의 대표적 복합도시이다.
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양잠과 수운, 시장문화가 번성한 한강 남변의 생활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지명 자체가 풍경과 관련 깊은 경우가 많고, 백제의 왕도(王都), 병자호란의 역사 현장, 근현대 개발과 올림픽 유산까지 고루 갖춘 이곳은 서울의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중요한 도시 공간이다.
✅ 송파구 관할 행정동 및 어원
송파구는 27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이름 대부분은 한강과의 관계, 풍수지리, 역사적 사건, 또는 지역 내 전통 산업에서 비롯되었다.
대표적인 동명 가운데 하나인 송파동(松坡洞)은 ‘소나무가 많은 언덕’을 의미하며, 조선시대부터 한강변 송파나루(松坡津)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수로와 육로의 교차지점이자, 상업이 활발하던 지역으로 ‘소나무 언덕 마을’이라는 이름이 오랫동안 불려졌다.
풍납동(風納洞)은 송파구에서 가장 유서 깊은 지명 중 하나로, ‘바람이 머무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백제 초도인 위례성(풍납토성)이 위치한 고대 유적지로, 지명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깊이가 함께 담겨 있다. 풍납토성은 한강유역 백제 초기 방어체계의 중심으로, 한민족 고대 국가 형성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잠실동(蠶室洞)은 조선시대 양잠업이 성했던 지역으로, ‘누에를 기르는 방’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잠실도회’라는 국가 기관이 실제로 이곳에 설치되어 왕실에서 직접 양잠을 감독했고, 누에고치 생산과 관련된 기술 전파가 이루어졌다. 이 전통이 현대에까지 이어져, 잠실이라는 이름은 곧 '풍요'와 '노력의 상징'이 되었다.
방이동(芳荑洞)은 본래 ‘방이군(防夷郡)’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지만, ‘이(夷)’가 외적을 뜻하는 부정적 한자라는 이유로 후대에 '향기로울 방(芳)'과 '흰싹 이(荑)'로 바꾸어 오늘날의 방이동이 되었다. 이는 단어의 뜻을 새롭게 해석하고 지역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했던 역사적 의도가 반영된 사례다.
석촌동(石村洞)은 문자 그대로 '돌이 많은 마을'을 뜻한다. 이 지역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진을 치면서 대규모로 돌을 옮기고 배치했던 데서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현재도 석촌호수 일대에는 마을의 전통과 역사를 잇는 흔적이 남아 있다.
삼전동(三田洞)은 ‘세 개의 밭’이라는 뜻이며, 조선 후기까지도 농경지가 많았던 데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역사적으로 더 잘 알려진 사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에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삼전동 일대는 삼전도비가 세워진 장소로, 조선왕조가 경험한 가장 굴욕적인 외교 사건의 현장이다.
오금동(梧琴洞)은 ‘오동나무와 거문고’라는 한자 의미를 갖는다. 과거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던 마을이었으며, 가야금을 제작하던 장인이 이곳에 살았다는 설도 전해진다. 또 다른 설로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난길에 이 지역에서 ‘오금(膝의 안쪽)이 아파 잠시 쉬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문정동(文井洞)은 ‘글월 문(文)’과 ‘우물 정(井)’으로 이루어졌으며,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이곳의 샘물을 마시고 그 맛에 감탄하며 문씨 성을 붙여 명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단순한 전설을 넘어, 지역 명칭에 물의 의미와 인문적 상징이 함께 담긴 흥미로운 지명이다.
거여동(巨餘洞)은 ‘거암(巨巖)’이라는 인물이 살았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김이', '겜리', '거여리'로 발음이 바뀌고 최종적으로 현재의 명칭이 되었다. 이는 구어에서 문어로 지명이 변화하는 전통적 사례로, 마을 전설과 민간의 입말 문화가 반영된 이름이다.
🏯 송파구 내 어원 및 사연이 깃든 지역・지명
송파구는 역사적 사건과 자연지리, 전설과 민속이 융합된 다양한 지명을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몽촌(夢村)은 과거 ‘곰말’이라 불리던 백제 시대 대도읍의 중심 마을로, ‘곰’은 고구려 또는 고대 부족의 상징이며, 한자화되면서 ‘꿈의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몽촌(夢村)으로 변화하였다. 이 이름은 백제의 도읍이었던 위례성(위례토성)의 존재와 더불어, 고대 마을 문화의 흔적이자 정신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또한 탄천(炭川은 ‘숯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하천으로, 성남시 탄리 일대에서 숯을 구워 나르던 길목이었으며, 비가 오면 검은 물이 흘렀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숯물 흐르는 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는 생활 생산과 환경이 결합된 실용적 지명에서 시작된 것으로, 마을의 산업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명칭이다.
📚 송파구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
송파구는 고대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중심 공간으로 기능해온 독보적인 지역이다.
특히 백제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에 존재했던 사실은 송파구가 단순한 도시 외곽이 아닌, 국가 중심의 정치·군사 요충지였음을 의미한다. 위례성은 전략적 요새이자 백제의 왕도였으며,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이미 송파 지역은 서울의 본류였다.
또한 송파는 조선시대 잠실도회가 설치되어 양잠 기술의 중심지로 기능하였고, 송파나루를 중심으로 한강을 따라 물자가 이동하는 교통 및 상업 거점으로도 성장하였다. 강남지역이 도시화되기 이전, 송파는 이미 문화와 경제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병자호란은 송파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굴욕의 장면을 남겼다. 인조가 삼전도(현 삼전동 일대)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며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한 사건은 조선왕조 외교사의 전환점을 상징한다. 그 현장에는 삼전도비가 세워졌으며, 이는 지금도 국가적 반성과 역사교육의 상징물로 기능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송파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지로 지정되면서 대규모 도시개발과 함께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잠실운동장과 올림픽공원은 송파의 도시 정체성을 스포츠·문화 도시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송파구는 고대 왕도의 흔적부터 근세 양잠업과 수운, 병자호란의 역사적 비극, 그리고 올림픽 유산과 현대 문화예술까지, 다층적인 시대의 흐름과 인간의 흔적이 공존하는 서울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지명 하나하나를 통해 지역민의 기억과 나라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송파는,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도시이자, 미래를 품은 문화 중심지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참조
1. 위례성, 백제의 첫 도읍지
백제 건국 초기, 온조왕은 하남 위례성(지금의 송파구 풍납동·몽촌동 일대)에 수도를 정하며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위례성은 ‘위(慰·평안)하고 례(禮·예절 있는) 고을’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당시 한강 유역의 수로와 농경지를 기반으로 정치·군사·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이 시기의 백제 수도 방어를 위한 성곽으로, 송파구가 한성백제의 출발점임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유적이다.
2. 풍납토성 – 백제 왕궁이 있던 성곽
풍납동에 위치한 풍납토성(風納土城)은 백제 초기의 왕궁과 방어체계를 동시에 갖춘 대표적인 고대 토성이다.
총 둘레 약 3.5km에 이르는 이 토성은 한강을 끼고 있는 평지형 성곽으로, 방어뿐 아니라 왕궁·주거·생산 공간이 함께 형성된 복합 정치도시로 해석된다.
출토된 목간, 옥기, 철기 등 유물들은 백제의 고도의 문화 수준을 보여주며, 송파가 단순한 변두리가 아닌 국가 정치의 핵심 공간이었음을 입증한다.
3. 몽촌토성 – 위례성 남쪽의 내성
올림픽공원 내부에 위치한 몽촌토성(夢村土城)은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 수도 위례성을 구성하던 내성(內城) 역할을 하였다.
몽촌(夢村)은 ‘꿈의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원래는 ‘곰말’이라 불렸던 곳으로, 곰은 백제 건국신화에서 중요한 상징(소서노와 온조의 어머니계 전설)이다.
몽촌토성은 군사적 요충지이자 왕실 거주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토성과 해자, 목책이 발견된 유적으로 백제의 체계적 도시 구조를 보여주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