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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부. 서울 지역 이름별 어원 분석 – 도봉구 편

by hwanee7 2025. 4. 26.

 

 

✅ 도봉구 관할 행정동 및 어원

 

도봉구는 서울 북동부에 위치한 자치구로, 도봉산 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으며 자연과 도시가 조화를 이루는 지역이다. 현재 도봉구는 도봉1동, 도봉2동, 방학1동, 방학2동, 방학3동, 쌍문1동, 쌍문2동, 쌍문3동, 쌍문4동, 창1동, 창2동, 창3동, 창4동, 창5동까지 총 14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봉구의 지명은 대표적인 명산인 도봉산에서 유래하였다. ‘도봉(道峰)’이란 이름은 ‘길 도(道)’와 ‘봉우리 봉(峰)’이 합쳐진 것으로, 예로부터 도를 닦는 선비와 승려들이 수도의 장소로 삼았던 이 산의 신성함과 기품을 상징한다. 이 도봉산 아래 형성된 마을이 ‘도봉동’이 되었고, 나중에 행정구역 명칭으로 확장되었다.

 

창동은 조선시대 이곳에 국영 창고가 있던 ‘창골’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창’은 창고를 뜻하며, 실제로 군량미 등을 보관하던 장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방학동은 ‘학이 날아 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시대 한 임금이 도봉산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학이 날아와 앉는 모습을 보고 이곳을 ‘방학(放鶴)’이라 부르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쌍문동은 말 그대로 ‘두 개의 문’이라는 뜻으로, 예전 이 지역에 위치했던 쌍문(雙門)이라는 지형적 특성이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구로서길과 도봉로가 교차하는 지역이 이 쌍문동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

 

 

 

 

🏯 도봉구 내 어원 및 사연이 깃든 지역・지명

 

도봉구에는 다양한 전설과 사연이 깃든 지명들이 존재한다. 창동과 방학동을 중심으로 여러 전통 마을의 명칭이 전해 내려오며, 이는 옛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자연환경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말미라는 곳은 한자로 '마산동(馬山洞)'이라고도 불리며, 과거 말을 방목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이름 그대로 말이 머물던 고개나 들판이었던 것이다.

 

모랫마을은 창동 인근의 마을로, 지형상 모래가 많았던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은 아파트와 도로로 덮였지만 예전엔 한강 지류의 퇴적층이 쌓여 모래밭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라깃들이라는 이름은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창동 유역의 옛 들판 이름으로 가뭄이 심할 때 하늘만 바라봐야 했던 지역이라는 뜻이 있다. 이러한 지명은 기후나 수자원 사정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삼봉못은 삼각산의 세 봉우리가 비친다는 의미로 지어진 연못 이름으로,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과 전통적인 풍수지리 신앙이 결합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방줏굴’은 마을 근처에 방죽(저수지)이 있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물을 모아 농사에 활용했던 선조들의 지혜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지명이다.

 

‘배라깃들’은 가뭄이 들면 수원이 없어 비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들판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들판’이라는 뜻이 붙었다. 이 이름에는 가뭄과 물 부족 속에서도 하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했던 당시 주민들의 간절한 마음이 스며 있다.

 

‘삼봉못’은 주변에 삼각산의 세 봉우리가 비쳐 보인다는 연못에서 유래되었다.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이름으로, 풍수지리적 신앙과도 연관이 깊다.

 

‘종자들’은 일곱 해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들판으로, 풍요로운 수자원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이 들판은 물이 귀했던 시대에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소중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 지명들은 대부분 현재의 행정동 체계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그 이름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와 기억은 오늘날 도봉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지명의 어원은 단지 옛 이름을 넘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적 유산이며, 도봉구의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살아 있는 역사책이라 할 수 있다.

 

 

 

📚 도봉구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

 

도봉구는 그 지형적 특성 덕분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아직 선사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한강 상류와 가까워 인류의 초기 정착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인해 잠시 고구려에 속하기도 했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도봉산 자락 아래에는 도봉서원, 연산군묘, 정릉, 안맹담의 묘와 같은 역사적 유적들이 들어서게 되며, 도심 속 전통문화의 보고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영국사는 고즈넉한 산사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 중 하나다.

 

근현대사에서도 도봉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창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이후 서울의 확장과 함께 근교 주거지로 발전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의 정착지로도 기능하였다.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본격적인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도봉구는 문화예술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창동의 세 사자'로 불리는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를 비롯해, 시인 김수영, 사학자 함석헌, 여성운동가 차미리사 등 도봉구와 인연이 깊은 인물들이 많다. 이러한 인물들의 발자취는 오늘날 도봉구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