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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부. 서울 지역 이름별 어원 분석 – 금천구 편

by hwanee7 2025. 4. 30.

 

 

서울 남서부에 위치한 금천구(衿川區)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서울의 마지막 자치구로, 과거 농경지와 산업지대를 아우르던 지역에서 첨단 산업단지와 주거 지역이 공존하는 도심으로 변화해온 곳이다. 한강의 지류인 안양천과 호암산 자락에 걸쳐 있으며, 고대 백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와 지명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 금천구 관할 행정동 및 어원

 

현재 금천구는 3개 법정동(가산동, 독산동, 시흥동)을 기반으로 행정동이 나뉘어 있다.


가산동은 1963년 가리봉리와 독산리를 합쳐 만든 동으로, '가리봉'의 ‘가’자와 '독산'의 ‘산’자를 따서 지어졌다.


독산동은 ‘벌거벗은 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실제로 이 지역의 산봉우리에 나무가 없어 ‘독(禿)’ 자를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흥동은 조선 정조 19년(1795) 금천현의 행정 명칭을 ‘시흥현’으로 바꾸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작할 시(始)’와 ‘흥할 흥(興)’이 합쳐져 ‘새롭게 번영하길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금천구는 단순히 서울의 끝자락에 위치한 지역이 아니라, 고대 백제부터 현대 도시계획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산업화와 더불어 자연유산, 역사적 사찰, 행궁, 그리고 지역 설화까지 어우러져 서울의 ‘뿌리’와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는 특별한 지역이다.

 

 

🏯 금천구 내 어원 및 사연이 깃든 지역・지명

 

금천구의 ‘금천(衿川)’이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23년(940년), 고대 명칭이었던 ‘잉벌노현(仍伐奴縣)’과 ‘곡양현’을 거쳐 ‘금주(衿州)’로 개칭되면서 등장했다. 이후 조선 태종 13년(1413)에 ‘금천현’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는 곧 서울 남부지역의 중심 행정단위가 되었다. ‘금(衿)’자는 옷깃을 의미하지만, 지명으로는 산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그 유순한 지세를 뜻하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름은 이 지역의 부드럽고 평탄한 지형, 그리고 물과 산이 어우러진 자연적 특성을 반영한다.

 

 

 

📚 금천구 역사 이야기

 

금천 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영토였으며, 고구려의 남하 이후 ‘잉벌노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이후에는 '곡양현'으로 불리며 율진군(오늘날 부천) 관할 속현으로 편입된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금주’로 개칭되었고, 조선 초 태종대에는 ‘금천현’으로 명명된다. 정조 19년에는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하여 왕의 능행길과 연결되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근대 이후, 1910년대에는 군청이 영등포 지역으로 옮겨졌고,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영등포구에 포함되었다. 이후 1980년에는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고, 1995년 가산·독산·시흥 지역이 분리되며 서울특별시 25번째 구, 금천구가 탄생하게 되었다.

 

 

 

📚 금천구 주요 문화유산 및 명소

 

금천구는 서울 남부의 대표적인 산업단지이자 자연과 전통이 어우러진 유산이 풍부한 지역이다.


대표적인 역사 유적으로는 호암산성이 있다. 이는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 남서부 방어를 위한 산성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또 다른 문화유산은 호압사(虎壓寺)로, 조선 태종이 무학대사에게 명하여 창건하게 한 전통 사찰이다. ‘호랑이의 기운을 누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실제 호랑이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시흥행궁터는 조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 융릉)을 참배하기 위해 남행하던 길에 잠시 머물던 별궁 자리로, 현재는 터만 남아 있지만 800년 넘는 은행나무 세 그루가 당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석구상(석재 조각상)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고 서울 장안의 재난을 방지하기 위한 상징물로 여겨진다.

 

 

 

📚 금천구와 관련된 설화・전설 모음

 

금천구에는 오래된 설화도 여러 가지 전해진다.


가장 유명한 것은 호압사 창건 설화로, 호암산에 호랑이 기운이 강해 백성들이 두려워하자, 태종이 무학대사를 보내 사찰을 세우고 기운을 눌렀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곧 ‘호압(虎壓)’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금천은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로도 전해지는데, 그의 뛰어난 병법과 충절이 지역의 명예로 이어지며 학교나 공원 이름에도 강감찬이 사용되고 있다.


시흥행궁의 은행나무 설화도 유명한데, 이 나무에 정조가 직접 기도하였으며, 이후에도 지역민들이 이 나무에 소원을 빌면 복을 받는다는 민간신앙이 전해진다.


호암산에는 ‘신랑각시바위(사랑바위)’ 전설도 있는데, 전쟁 중 헤어진 신랑 신부가 이곳에서 돌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은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 애틋한 이야기로 회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