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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서울 지역 이름별 어원 분석 – 용산구 편

by hwanee7 2025. 4. 11.

 

서울 용산구 항공뷰
서울 용산구 항공뷰

 

 

✅ 용산구 관할 행정동 및 어원

 

후암동은 ‘후(後)’는 뒤쪽, ‘암(岩)’은 바위를 의미합니다. 경복궁의 뒤쪽 산자락에 큰 바위가 많아 ‘궁 뒤 바위 동네’라는 의미로 유래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도성의 외곽이자 방어 요충지로 활용되던 곳입니다.

 

용산2가동은 용산의 대표 지역명 중 하나로, ‘용산(龍山)’은 한강과 남산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의 지세가 마치 용이 누운 형상이라 하여 붙여졌습니다. 풍수지리상으로도 길지(吉地)로 여겨졌으며,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남영동은 한자로 '남쪽의 영지(營地)', 즉 군사 부대가 있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시대부터 군사 시설이 많았고, 근현대에는 헌병대, 경찰청 관련 시설이 들어서면서 이름 그대로의 기능이 이어졌습니다.

 

청파동은 조선시대 청파(靑坡)라는 성씨 또는 청청한 언덕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구체적인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지금은 숙명여대와 청파초등학교가 위치한 교육·주거 지역입니다.

 

원효로1·2가동은 불교 고승 원효대사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으며, 불교적 색채가 담긴 도로명 중심 지명입니다. 행정동명은 도로명에 기반하여 설정된 경우로, 실제 원효와의 직접적 연고는 없습니다.

 

효창동은 ‘효창원(孝昌園)’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조선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능(효창원)이 있었던 곳이며, 후일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가 안장되면서 ‘효창공원’으로 발전했습니다.

 

용문동은 불교와 관련된 이름으로, ‘용문’은 ‘용의 문’, 즉 신령스러운 출입구를 의미합니다. 실제 유래는 불확실하나, 이 지역이 남산 자락의 산세가 깊은 곳이라 이런 명칭이 붙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배동은 '문(文)'과 '배(拜)'의 결합으로, 배움과 예를 숭상하는 동네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확한 지명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 문창학교 등의 교육시설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촌1·2동은 '이촌(二村)'이라는 이름 그대로 두 개의 마을, 혹은 마을이 둘로 나뉘었다는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이촌은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인 거주지였고, 광복 후에는 고급 주거지로 재편되며 이촌1동(한강변), 이촌2동(남산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한남동은 ‘한강 남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일본 군인들과 부유층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외국 대사관 및 외국인 거주자가 많은 서울의 국제적 동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태원1동은 조선시대 외국 사신들이 머물던 ‘이태원관(二台院)’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며, 다른 설로는 불교 사찰 ‘이태사(伊太寺)’에서 따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주한미군이 주둔하면서 ‘국제문화거리’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태원2동은 행정동 분리로 설정된 이름으로, 이태원 지역의 확장된 중심 상업지구입니다. 외국 음식점과 문화공간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보광동은 불교 용어인 보광(普光)에서 유래했으며, ‘모든 곳을 비추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남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고지대로, 조용한 주거지가 형성된 지역입니다.

 

 

 

 

🏯 용산구 내 어원 및 사연이 깃든 지역・지명

 

용산(龍山)이라는 이름 자체가 풍수지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남산과 한강 사이의 완만한 구릉지대가 용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용산’이라 불렸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 요충지로 활용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일본군과 미군의 주둔지로, 21세기에는 용산공원과 미군기지 이전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효창공원은 원래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능인 효창원(孝昌園)이 있던 자리로, 대한제국 시기에는 왕실 묘지로 사용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7인의 유해가 안장되며 독립운동 성지로서의 상징성을 얻게 됩니다. (김구 선생,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안중근 의사 가묘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7인의 묘역). 김구 선생은 생전에 “장차 이곳이 독립정신을 기리는 국립묘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태원은 다양한 이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이태원관(二台院)’이라는 외국 사신 숙소가 조선 후기 이 지역에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또는 불교 사찰인 이태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해방 이후에는 주한미군이 이 지역을 사용하면서 다문화·다국적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1980~90년대에는 외국 상점과 음식점, 클럽들이 모여들며 서울에서 가장 국제적인 거리로 발돋움했고, 이는 한국의 도시문화와 글로벌화 과정을 상징하는 공간으로도 평가받습니다.

 

한강로 일대는 한강변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한강 나루터로서 물류 교통의 중심이었습니다. 현대에는 철도, 도로, 주거지가 조화를 이루는 교통의 핵심지로 발전하였습니다.

 

남영동은 일제강점기 이후 헌병대와 경찰청 예하 기관들이 주둔하면서 경찰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지역입니다. 특히 민주화운동 시기 ‘남영동 대공분실’로 악명이 높았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과거 치안본부(현 경찰청) 산하 대공분실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곳은 1970~80년대 유신 정권과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가들이 불법 감금, 고문당한 장소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하면서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고, 결국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시작을 알리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남영동 대공분실 인권기념관’으로 리모델링되어,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공간으로 운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