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의 북쪽에 위치한 성북구는 조선시대 도성(한양성) 북문을 지나 외곽으로 연결되던 교통로이자, 예로부터 명당과 학문,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온 곳입니다. ‘성북(城北)’이라는 이름 자체가 ‘도성의 북쪽’이라는 지리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처럼 성북구는 서울의 전통과 자연이 공존하는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자치구입니다.
✅ 성북구 관할 행정동 및 어원
돈암동은 조선시대부터 ‘돈암방(敦岩坊)’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돈(敦)’은 두터움, ‘암(岩)’은 바위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 지역에 큰 바위 지형이 많고, 예부터 학문과 덕성을 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살았던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성균관 유생들이 학문을 익히던 곳으로도 전해집니다.
동선동은 성북로 동쪽의 선비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 한성 북문을 나선 뒤 선비들이 학문과 강론을 이어가던 공간으로 기능했던 지역입니다.
삼선동은 ‘세 명의 선비가 뜻을 함께한 곳’이라는 설화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고려·조선 시대 문사들의 고택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또는 지형상 세 갈래 언덕이 갈라지는 곳이라는 의미도 함께 전해집니다.
보문동은 ‘문을 지키는 지역’이라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도성 북문인 보문(普門) 일대를 따라 형성된 마을입니다. 종교적 의미의 ‘보문’이 아니라, 방위적 기능에 가까운 이름으로 해석됩니다.
정릉동은 조선 태종의 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이 위치한 곳입니다. 능이 세워진 이후 마을 이름도 함께 ‘정릉’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성북구 내 가장 역사성이 깊은 지명 중 하나입니다.
길음동은 ‘길하고 음기 좋은 땅’이라는 의미의 한자 이름으로, 풍수지리적으로 양기와 음기가 조화를 이루는 지형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하월곡동 / 상월곡동은 조선시대 ‘달을 보는 마을’이라 하여 ‘월곡(月谷)’이라 불리던 곳에서 나뉘어 형성된 지명입니다. 상·하로 구분된 것은 행정 구역 분리에 따른 것이며, 과거 이 일대는 과수원과 농경지가 널리 퍼진 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장위1~3동은 ‘긴 고개 마을’이라는 의미의 ‘장위(長位)’ 또는 ‘장곡(長谷)’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장위천과 고개 지형에서 유래된 자연 마을 이름입니다.
석관동은 ‘돌 석(石)’, ‘관리할 관(官)’을 써서 ‘돌무더기를 관리하던 곳’ 또는 ‘석관묘(石棺墓)’가 발견된 곳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고분 유적이 존재했던 곳으로, 역사적 유래가 깊은 지명입니다.
안암동은 고려대학교 인근으로 잘 알려진 지역으로, ‘편안한 바위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며, 성북천과 인접한 평지에 위치한 조용한 자연 마을이었습니다.
월곡동은 과거에는 상월곡, 하월곡이 하나의 마을이었고, ‘달(月)이 잘 보이는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고요하고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전통적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 성북구 내 어원 및 사연이 깃든 지역‧지명
성북구는 서울 도성의 북쪽에 위치하면서, 조선시대 이후 능묘 문화, 유교 학문, 풍수 명당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지역 정체성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릉입니다. 정릉은 조선 태종의 비이자 조선 개국 2년 만에 요절한 신덕왕후의 능으로,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와의 갈등으로 능을 한동안 홀대하다 말년에 이곳을 정비한 일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 능을 중심으로 한 성역화 작업과 더불어, 정릉은 오랜 세월 왕실을 기억하는 지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북구에는 조선 시대 학문이 번성한 지역이라는 특성이 뚜렷합니다. 돈암동, 삼선동, 동선동, 보문동 등은 모두 ‘유학(儒學)의 마을’로 기능했던 곳으로, 성균관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선비 문화가 뿌리내린 공간입니다. 이 일대에는 지금도 고택, 서당, 유림 활동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 지명들은 지역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안암동과 보문동을 중심으로 한 고려대학교 캠퍼스타운, 정릉, 길음동의 주거지 확대, 월곡동과 장위동의 재개발과 도시 재생 사업 등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동의 이름 속에는 여전히 성북의 옛 지형, 전통,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 성북구와 관련된 역사적 이야기
1. 정릉 – 신덕왕후의 능이 품은 조선 왕실의 비극
성북구 정릉동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기여를 했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이 위치한 곳입니다. 그러나 신덕왕후는 태종 이방원의 정치적 견제를 받아 능이 홀대당하고 능지처분된 정몽주와 연결되어 금기시되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기 왕권과 가문 간의 갈등, 그리고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이 고스란히 담긴 장소로, 단순한 능 이상으로 조선 정치사의 상징적 공간입니다.
2. 돈암동·삼선동 – 성균관 유생의 길, 유교 학문의 터전
성북구의 돈암동, 삼선동, 동선동 일대는 조선시대 유생들이 성균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처를 두고 학문을 연마하며 유림 모임을 갖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돈암(敦岩)'은 ‘두터운 바위’라는 뜻으로, 굳건한 학문과 인격을 닦는 공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명칭이기도 합니다. 이 지역에는 실제 옛 서당과 고택, 그리고 유학자들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유교 정신의 전통을 간직한 지역으로 기록됩니다.
3. 안암동과 고려대학교 – 민족교육의 중심지
안암동과 보문동 일대는 광복 이후 고려대학교가 자리 잡으며 성북구를 대표하는 교육·학술지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고려대학교는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이후 민족 자본과 민족 지식인의 힘으로 세워진 사립대학으로, 안암동 일대는 그 상징성과 함께 지식인 운동, 학생 운동, 민주화 운동의 거점이 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이 지역은 ‘고대앞’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교육·출판·토론 문화가 활발한 대학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4. 성북동 고택과 근대한옥촌 – 근대 지식인의 삶터
성북구 성북동은 20세기 중반, 서울에서도 드물게 자연과 도심이 조화를 이루는 고지대로서 주목받아, 많은 문화예술인, 지식인, 정치가들의 거주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유명한 고택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습니다:
-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만해가 일제의 눈을 피해 북향으로 지은 집. 현재는 기념관으로 운영 중.
- 간송 전형필의 보화각: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보존한 간송이 세운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의 전신.
- 이태준 가옥: ‘달밤’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이태준이 거주했던 집으로, 당시 문인들의 교류공간.
성북동 고택들은 단순한 전통 건축물을 넘어, 한국 근대 정신문화의 산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5. 선잠단 – 뽕나무와 누에를 위한 제사의 터
성북구 성북동 언덕길에 위치한 *잠단(先蠶壇)은 조선시대 국가가 주관한 ‘양잠(養蠶)’ 제사 의식이 이루어졌던 신성한 제단입니다.
‘선잠(先蠶)’은 중국의 누에 여신으로, 조선 왕비가 직접 제를 올리는 국가 행사였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누에와 비단은 국가 경제의 중요한 자원이었기에, 이를 위한 제의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이 유적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국가 제사 유적지로, 선농단(先農壇)과 함께 농업과 산업을 국가적으로 기원하던 공간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현재는 조용한 언덕길 속 유적지로 보존되며, 성북의 전통과 제례 문화를 상징합니다.
6. 북한산성과의 연결 – 성북구의 방어 요지로서의 기능
성북구 북부는 북한산성의 동남쪽과 맞닿아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외침을 막는 서울 북방 방어선의 전초기지로 기능했습니다.
특히 정릉, 길음, 월곡, 장위 일대는 모두 도성 바깥에 위치한 산줄기와 골짜기에 자리하며, 유사시 왕의 피난로 또는 군사 진출로로 활용될 수 있던 지역입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 북한산성정릉도성 북문을 잇는 도로망은 군사·물자 이동 경로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지금도 성북구에는 북한산 국립공원과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고, 성북천과 한양도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자연지형과 방어 전략이 겹치는 지역 특색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성북구는 단순히 조용한 주거지가 아닌,
전통문화, 근대 지식인 사회, 농업과 국방의 정신이 겹쳐 있는 다층적인 역사문화공간입니다.